연두연두, 새싹 여린 삶의 꽃보다 고운 빛깔이니.
기억력의 감퇴(減退)나 망각(忘却)의 덕분일 터다. 실은 작년에도, 그 전 새봄도 이뻤다.
“어머, 저 연두연두, 나 몰라!” 하얀 꽃그늘의 여인들이 못 참은 외마디들은 그래서 해마다 더 싱그럽다. 봄과도 썩 어울리는, 피아졸라의 탱고 곡 ‘오블리비온’(망각)의 선율을 떠올린다.
푸른 빛깔, 벽(碧) 취(翠) 창(蒼) 청(靑) 등이 더 있지만, 어찌 매화(梅花)와 함께 봄을 밀고 피어나는 새 움과 싹의 연두와 아름다움을 비길 것이냐. 시간은 이내 초록으로 흐른다. 여름 냄새 스미면 대지는 검푸름으로 생명력을 덥힌다.
합쳐서 신록(新綠)이라 하자. 이 계절에는 나도 신록이 된다. 그래야 하리. 저 연두 앞에서 설레지 않는 이와는 말도 하지 말자.
연두, 연한(軟) 콩(豆) 軟豆다. 완두콩 색이라고들 한다. 엷은 녹색이며 영어로는 노란 녹색(옐로 그린)이다. 교육용 색상환(色相環)에 드는 주요 색상 중 하나이고, 산업용 (먼셀)색표계의 색상 값은 ‘7.5GY 7/10’이다.
기호나 수치는 잊어도 된다. 하여튼 고운 색이다. 자연의 하나, 완두콩이 저 색깔의 이름이 되었구나. 초록은 어디에서 왔을까.
초록(草綠), 풀(草)의 빛깔 녹색(綠色)이다. 綠은 실 사(糸)와 새길 록(彔)의 합체다. 옛적 식물(나무)을 써서(가공해) 실이나 옷감에 색을 입히던 데서 나온 글자겠다.
연두의 다음 초록, 이름이 다른 만치 구분의 기준이 있으리라. 영어로 그린이다. 색상 값은 ‘2.5G 4/10’이다. 안전을 상징하는 표준 색상, 교통 신호등의 그 초록이다.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, 초록의 상징성은 널리 타당하겠다.
초록동색(草綠同色)이란 말의 활용 사례는 좀 불결(不潔)하다. 유유상종(類類相從)이나 ‘끼리끼리 해먹는다.’는 뜻으로 원용(援用)돼 흔히 쓰인다.
영어 속담 ‘깃털 같은 새들끼리 함께 떼 지어 난다.’(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.)는 말이 이 유유상종에 해당하겠다. 부정적(否定的)인 뉘앙스(속뜻, 느낌)를 풍긴다.
중립적(中立的)인 뜻으로도 쓰지만, 긍정적(肯定的)으로 쓰는 경우는 별로 없는 듯하다. ‘끼리끼리 해먹는다.’는 뜻을 표현하고자 할 때 유유상종까지는 좀 봐줄 수 있으되, 초록동색은 쓰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. 늘 말글 생각하는 필자의 희원(希願)이다.
아무리 풀빛과 녹색이 같다한들 저런 따위에 그 아름다움을 비유하다니 하는 원망(怨望)인 것이다. 허나 어쩌랴, 생물(生物)처럼 말은 살아 뛰며 돌아다니는 것인데.
‘푸르다’는 우리말은 여러 느낌의 저 푸르름들을, 초록(green)부터 하늘(蒼空 창공)의 색 블루(biue)까지도, 낙낙히 품는다. 따로 녹색을 뜻하는 토종말이 없는 것이다.
이는 토종(土種) 우리말이 저런 계통의 색을 우리의 의식(意識)에 잘 반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. 이젠 ‘녹색신호등’에 좀 익숙해졌지만, 요즘도 ‘파란불에 건너라.’고들 하지 않는가.
碧 翠 蒼 靑 綠 등 한자(어)들은 ‘(어떻게) 푸르다.’는 여러 느낌을 우리말에 이바지한다. 한국어의 주요 요소인 한자어의 역할이다.
문명은 이렇게 역사(시간)의 세로(縱)와 공간(글로벌)의 가로(橫)를 종횡(縱橫)으로 현대의 우리와 얽혀있다. 이 얽힘은 갈등도 포함한다. 여러 언어(의 차이)가 중요하게 작용한다. 서양의 비트겐슈타인이란 학자가 제시한 ‘언어철학’이란 장르(학문분야)도 결국 이런 얘기와 통한다.
연두와 초록, 그 고운 뜻이 마련한 새봄의 ‘의식의 흐름’에 문득 젖어본다.
[전국매일신문 칼럼] 강상헌 언어철학자·시민사회신문주간